일상 생각

본가에 내려온 날 일기 (24.02.25)

김담대 2024. 2. 25. 17:38

오랜만에 본가에 내려왔다.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기숙학교에 살아 부모님을 자주 뵙지는 않는 편이다. 이제는 혼자 사는 게 더 편하고 익숙해져 어느 정도의 의무감으로 본가에 내려간다.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라기보다 효녀행세를 하기 위함이다. 그렇지만 막상 내가 내려왔다고 맛있는 과일을 사두시고, 평소엔 잘 안 드시는 소고기를 사고, 보일러를 올리며 맞이해 주시는 부모님을 보면 죄책감이 들곤 한다. 특히나 가끔 내려오니 못본새 늘어난 흰머리와 주름들을 보며 아 더 자주 내려와야겠다, 하고 마음을 먹게 된다. 그렇지만 뭐 그것도 잠시이고, 나를 평온한 상태에 잠시도 내버려 두지 못하는 엄마의 잔소리와 술 마시고 주정을 하는 아빠, 그리고 그 둘의 높아진 언성, 그다음 날 화난 엄마의 매서운 침묵과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아빠의 숨 막히는 무심함에 당장이라도 짐 싸서 서울로 올라가고 싶단 충동을 하루에도 몇 번씩 억누르곤 한다. 실제로 못 버티고 예상보다 빨리 서울로 올라가는 고속버스를 예매했던 적이 빈번하다. (사실은 대부분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엄마는 침묵을 선택했다. 이유는 뻔하다. 아빠가 전날 술을 마셨기 때문이고, 영덕을 가기로 한 오늘 아빠와 나 둘 다 점심쯤에야 느지막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전엔 엄마의 이러한 태도가 이해가 안 갔다. 영덕을 갈 거니까 일찍 일어나라며 깨우면 되는 건데 왜 그렇게 시위하듯 침묵을 선택한 것일까? 난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 적이 많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아빠는 엄마가 '설거지 내가 할 거니까 내버려 두어~'라고 했기 때문에 설거지를 안 했다고 했다. 아빠는 술 마시면 본인이 폭력적으로 구는 것도 아니고, 아무한테 피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매일같이 술 마시는 게 뭐 어떻냐고 그랬다. 영덕 늦게 일어났지만 지금이라도 가면 되지 왜 그러느냐고 그랬다. 엄마와 아빠의 노후연금을 모아 과수원을 사는 것에 겨우 동의한 엄마이지만 아빠는 2,000평 과수원을 사는 데 혈안이 되어 엄마의 간섭은 전부 싫은 모양이다. 당신이 반대할 때 땅을 샀어야 하는데, 간섭하지 말라는 식의 알코올 냄새나는 말 뿐이다. 옆에서 보고 있는 나도 답답한데, 아빠의 이런 무심함을 30년간 어떻게 견뎌왔을까 엄마는?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나의 무심함도 되돌아보게 되었다.

사실은 나도 영덕이 가고 싶지 않았으니 늦게 일어난 거다. 본가 내려오기 전 엄마랑 둘이서 놀러 갈까?라는 엄마의 말에 그러자 ~라고는 했지만 사실 귀찮다는 생각뿐이었으니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다. 영덕을 가자 라고 한 것도 그저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런 무심한 딸내미와 수동적인 남편 사이에서 결국은 침묵을 선택했을 거다.

영덕으로의 여행은 엄마의 침묵으로 취소되어 카페에 나와 있는데, 엄마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늘은 할아버지네 집에서 잘래?라는 카톡이었다. 그 낡은 시골집에서 왜? 하고 물어보니 여행 간 기분이 들잖아.라고 대답했다. 갑자기 이런 나의 태도가 너무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빠의 무심함에 엄마를 동정하면서도 실제로 나 또한 아빠의 무심함을 닮아 엄마를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버스표를 두 장 예매했다. 내일은 정말로 경주를 가야겠다. 여행 간 기분이 아니라 정말 여행을 간 기분이 들 수 있게. 효녀행세 좀 해봐야지